필사-우국 필사



우국

미시마 유키오 三島 由紀夫


1

쇼와 11년(1936년) 2월 28일, 죽 2․26사건 발발 3일째, 근위보병 제1연대 소속의 다케야마 신지 중위는, 사건 발생 후 반란군에 가입한 친구들 문제로 번민을 거듭한 끝에, 황군끼리 서로 쏘아 죽여아만 하는 사태로 치닫게 된 정세를 통분, 요츠야구 아오바초에 위치한 자탁의 8장짜리 방에서, 군도로 할복자살하였으며, 그의 부인 레이코도 역시 남편의 뒤를 따라 칼로 자결하였다. 중위가 남긴 유서에는 ‘황군의 만세를 기원한다.’란  단 한 구절이 쓰여 있었을 뿐이며, 부인의 유서에는 ‘군인의 아내로서 올 것이 왔습니다.’라는 말과 부모보다 앞서 가는 불효에 대한 용서를 빌고 있었다. 열녀 열부의 최후, 참으로 혼백마저 울릴 기개 있도다. 중위의 나이 향년 30세, 부인은 23세였다. 화촉을 밝힌 지 아직 반년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2

다케야마 중위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물론, 신랑 신부의 얼굴을 기념사진에서 보았을 뿐인 사람들도, 이 두 미남 미녀의 모습에 새삼 감탄하였다. 군복차림의 중위는 군검을 왼손에 집고 오른손으로는 군모를 벗어 들고 당당하게 신부를 감싸고 있었다. 참으로 늠름한 생김 생김으로, 짙은 눈썹도 크게 뜬 눈동자도 청년의 정갈함과 떳떳함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새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신부의 아름다움은 그 무엇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우아한 눈썹 아래 동그란 눈에도, 오똑한 콧날에도, 도톰한 입술에도, 요염함과 고상함이 함께 어려 있었다. 살포시 예복 소매에서 고개를 내밀고 부채를 쥐고 있는 손마디 끝은 섬세하면서 가지런히 놓은 것이 흡사 박꽃의 봉오리 같았다.

두 사람의 자결 후, 사람들은 자주 이 사진을 꺼내어 보고는, 어째서 이렇듯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남녀의 결합에 불길한 살이 끼어들었냐고 탄식하였다. 사건 후 이 사진을 보니, 기분 탓인지 금박 병풍 앞에 서 있는 신랑 신부는 두 사람 다 맑은 눈동자로, 바로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중매를 선 오제키 중장의 소개로, 요츠바구 아오바초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접살림 집이라 해도, 작은 정원이 있는 방 3칸짜리 초라한 셋집인 데다 아래층에 있는 두 방에는 햇볕도 잘 들지 않아서 이 층의 여덟 장짜리 방을 침실 겸 응접실로 삼았다. 게다가 가정부 둘 형편도 못 되어 레이코 혼자 빈집을 지켰다.

신혼여행은 마침 군에 비상이 걸려 있어 가질 못했다. 둘이 첫날밤을 보낸 것은 이 집에서였다. 초야를 치르기 전, 신지는 군도를 무릎 앞에 두고 군인다운 훈계를 하였다. 군인의 아내가 되는 자는 언제 어느 때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일일지라도, 아니면 모레일지라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 닥쳐오더라도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 서랍을 열어, 시집올 때 어머니께 받은 혼수품 중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던 은장도를 꺼내, 남편과 똑같이 자기 무릎 앞에 놓았다. 이것으로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훌륭한 묵계가 성립되었으며, 두 번 다시 중위가 아내의 각오를  묻는 일은 없었다.

결혼 후 몇 달쯤 지나자, 레이코의 아름다움은 더욱더 빛이나, 비온 뒤 맑게 갠 하늘의 달처럼 환했다.

두 사람은 모두 실로 젊고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들이라 이들의 사랑 행위는 매우 격렬했는데, 이것은 밤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훈련에서 돌아온 중위는 먼지투성이 군복을 벗다가 그 틈도 참지 못해, 집에 돌아온 그 자리에서 아내의 가는 허리를 꺾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곧잘 이에 응하였다. 첫날밤으로부터 한 달이 채 될까 말까 할 때, 레이코는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 중위도 이를 알고 기뻐했다.

레이코의 몸은 희고 성스러웠으며, 한껏 부풀어 오른 유방은 몹시도 강한 거부의 결벽성을 보이고 있었지만,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그것이 오히려 잠자리의 따스함을 채워 주었다. 이들은 잠자리에서도 무섭고도 엄숙할 정도로 진지하였다. 점차 격렬해지는 광란 속에서도 그들은 진지함을 유지하였다.

함께 있지 못하는 낮시간 동안에도 중위는 훈련 도중 짬짬이 아내를 그리워했으며, 레이코도 하루 종일 남편의 모습을 좇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도 결혼사진을 보고 있으면 행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레이코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남에 불과했던 한 남자가 지금은 모든 그녀 세계의 태양이 된 것에 이제 더 이상 아무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도덕적이었으며, 교육칙어 중의 ‘부부는 금슬이 좋아야 한다.’는 가르침에도 어긋남이 없었다. 레이코는 단 한 번도 남편에게 말대꾸하지 않았으며, 중위도 아내를 꾸짖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했다. 아래층 신전에는 황태신궁에서 받아 온 부적과 함께 천황과 황후 양 폐하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중위는 아내와 함께 이 신전 아래에서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신전에 바치는 물은 매일 새로 떠다 놓았으며, 신전에 꽂힌 비쭈기나무는 언제나 윤기가 나고 싱싱하였다. 이렇듯 두 사람의 세계는 모두 엄숙한 신의 권위로 지켜지고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온몸 구석구석까지 몸서리쳐질 듯한 쾌락 또한 넘치고 있었다.


3

2월 26일 아침, 사이토 내무장관 저택 근처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아무런 총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저 10분간의 참극이 끝난 후, 눈 덮인 새벽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진 집합 나팔 소리가 중위의 단잠을 깨뜨렸을 뿐이다. 중위는 튀듯이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군복을 입고 아내가 내미는 군도를 차더니 아직 채 밝지 않은 눈 덮인 아침 길을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28일 저녁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코는 얼마 안 있어 라디오 뉴스로 이 돌발 사건의 전모를 알았다. 그로부터 이틀간의 레이코 혼자만의 생활은 정말 조용하게, 대문을 꼭 걸어 잠근 채 지나갔다.

레이코는 눈 내리던 아침에 아무 말 없이 뛰어나간 중위 얼굴에서 이미 죽음의 결의를 읽은 것이었다. 남편이 이대로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경우, 뒤를 따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신변 정리를 시작하였다. 몇 벌 있는 나들이옷들은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유품으로 나눠주기로 하고 각각의 옷 보관함 위에 받을 사람의 주소와 이름을 썼다. 평소 내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도 있고 해서, 결혼 후에는 일기도 쓰지 않고 있던 레이코는 요 몇 달 동안의 행복을 써 놓은 일기를 정성껏 다시 읽은 후, 불에 던져 태워버리는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다. 라디오 옆에는 도자기로 만든 작은 개, 토끼, 다람쥐, 곰, 여우가 있었다. 그리고 작은 항아리와 물병도 놓여 있었다. 이것이 레이코의 유일한 수집품이었지만, 이 친구들은 유픔으로 줘 봤자 별의미도 없겠거니와 더더군다나 일부러 관 속에 넣기에도 뭐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도자기로 빚은 이 작은 동물들은 한층 더 초점을 잃고 기댈 곳 없는 애절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레이코는 그중 다람쥐 한 마리를 손에 쥐어보고, 이런 자신의 철없는 애착심 너머 아득한 곳에 있는 지아비가 구현하고 있는 태양처럼 크게 빛나는 대의를 우러러보았다. 자신은 기꺼이 그 빛나는 태양 같은 남편의 큰 뜻을 따라 죽을 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자서 이런 철없는 애착심에도 잠겨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코가 이런 것들을 사랑한 것은 옛날이었다. 지금은 사랑했던 추억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므로 마음속은 보다 격렬한 것, 보다 더 광적인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욱이 레이코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낮과 밤의 육체의 향연을 단 한 번도 쾌락 따위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아름다운 손가락은 2월의 추위에 더해지는 도자기 다람쥐의 얼어붙을 듯한 감촉으로 몹시 시렸으나, 이런 와중에도 중위의 억센 가슴이 덮쳐누르는 찰나를 생각하니, 곱게 차려입은 비단옷 앞자락에 늘어선 옷무늬 아랫부분이 눈도 녹일 만한 뜨거운 분비물로 축축해짐을 레이코는 느꼈다. 남편 없는 빈집에 홀로 있는 레이코에게, 뇌리에 떠오르는 죽음 따위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 그 비탄, 그 고뇌, 그 사고,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육체와 완전히 동일하게 그녀를 쾌적한 죽음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사상의 어떤 파편과도 그녀의 몸은 안락하게 융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이코는 또한 시시각각 들려오는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다가 남편 친구 몇몇의 이름이 궐기자들 속에 섞여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죽음의 뉴스였다. 그리고 사태가 날로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았다. 언제 칙명이 내려질지도 알 수 없었으며, 거사 초기에는 유신을 위한 궐기로 알려졌단 것이 반란이란 오명으로 더럽혀지고 있음을 똑똑히 알았다. 부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는 시내에서 언제 전투가 시작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28일 저녁 무렵, 현관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를 레이코는 극심한 공포 속에서 들었다. 뛰어나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간유리 건너편의 그림자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남편임에 틀림이 없었다. 레이코가 지금까지, 이 미닫이문 열쇠가 이 만큼 더디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열쇠는 손에서 더욱더 겉돌아 미닫이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카키색 외투로 감싼 중위의 몸이 눈과 진흙 범벅으로 무거워진 장화를 현관 시멘트 바닥에 우뚝 세웠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나온 행동인지 레이코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하며 레이코는 깊이 머리를 숙였지만 중위는 대답이 없었다. 군도를 풀고 외투를 벗기 시작하자 레이코는 뒤로 돌아가 이를 거들었다. 받아 들고 보니 외투는 꽤 차갑고 축축했는데, 이것이 양달에서 풍겨나는 말똥냄새를 지워 주며 레이코의 두 팔을 무겁게 눌렀다.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군도를 안아 들고, 그녀는 장화를 벗은 남편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아래층에 있는 여섯 장짜리 방이었다.

밝은 불빛 아래서 본 남편의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여있었으며 초췌하게 여위어 있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뺨은 푹 패어 있어 광택과 탄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돌아오자마자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저녁밥을 재촉하곤 했었는데, 이날은 군복 차림 그대로 책상다리를 하고 탁자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레이코는 저녁 준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묻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중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난 몰랐어……. 그 친구들은 날 부르지 않았어. 내가 아직 신혼이라고 나만 안 껴준 걸까…… 가노도, 혼마도, 그리고 야마구치도 말야.”

레이코는 남편의 벗들이며 종종 이 집에도 놀러온 적이 있는 잘생긴 청년 장교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마 내일이라도 칙명이 내려질 거야. 녀석들은 반란군이란 오명을 쓰게 되겠지. 난 부하들을 지휘해 녀석들을 쏴야만 하고……. 난 못해. 죽어도 쏠 수 없어.”

그는 말을 계속 이었다.

“난 지금 경비교대 명령을 받고 오늘 하룻밤 귀가를 허락 받았어. 아침이 되면 녀석들을 쏘러 가야 돼.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레이코.”

레이코는 똑바로 앉아 눈을 아래로 뜨고 있었다. 이미 숙지하고 있는 바였지만 남편은 단 하나뿐인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중위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죽음으로 뒷받침되었으며, 이 검고 견고한 뒷받침 덕에 말 한 마디가 요지부동처럼 보이는 중위의 의지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중위는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아무런 주저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침묵이 흐르는 동안에는 해빙기의 시냇물 같은 청렬함이 있었다. 중위는 이틀간에 걸친 긴 고뇌 후, 자신의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마주 앉았을 때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자신의 무언의 각오를 잘 헤아리고 있음을 바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중위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잤을 텐데도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을 당당하게 뜨고 처음으로 아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난 오늘 밤 할복하겠어.”

레이코의 눈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 둥글고 귀여운 눈에서 나오는 의욕의 눈빛은 큰 방울 소리와도 같았다.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함께 뒤를 따르게 해주십시오.”

중위는 거의 그 눈빛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중대한 결정이 마치 실없는 농담이라도 하듯 막힘없이 나올 수 있으며, 또 이렇게 중대한 허락의 말을 이런 경망스러운 표현으로 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 같이 가자. 단, 내가 먼저 갈 테니 당신은 내 할복을 끝까지 지켜봐 줘. 알겠지?”

이렇게 말하고 나자, 두 사람의 가슴속에는, 갑자기 해방된 듯한 환희가 불끈 솟구쳐 올랐다.

레이코는 자신을 믿어 주는 남편의 큰 신뢰에 몹시 감복하였다. 중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살에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끝까지 지켜봐 줄 사람이 있어야만 했다. 이 일을 맡을 사람으로 아내를 고른 것이 제 1의 신뢰였다. 함께 죽을 것을 약속하면서, 아내를 먼저 죽이지 않고 아내의 죽음을 자신은 이미 확인할 수 없는 미래로 미루어 두기로 한 것은, 더욱더 큰 제 2의 신뢰였다. 만약 중위가 의심이 많은 남편이었다면 다른 평범한 동반자살처럼 아내를 먼저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리라.

중위는 신혼 첫날밤부터 레이코를 오늘 이 자리까지 이끌어 왔으며, 레이코가 지금 이 순간에 이르러 ‘함께 따르겠다’는 소리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할 수 있게 된 것을 보고 그동안 해온 교육의 큰 성과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중위의 자부심을 위로했다. 또한 그는 이 사실을, 중위에 대한 애정이 자발적으로 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변변치 못한 자만을 하는 남편이 아니었다.

기쁨은 너무도 자연스레 서로의 가슴속에서 솟구쳐 나와 마주 대한 두 얼굴은 저절로 미소 지었다. 레이코는 신혼 첫날밤이 다시 찾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는 고통도 죽음도 없었으며, 자유가 넘치는 넓디넓은 들판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목욕물 받아놨어요. 씻으셔야지요?”

“그래.”

“저녁은요?”

이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도 담담하고 가정생활 속애서 지극히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부부의 그것처럼 들려, 중위는 자칫 혼돈에 빠질 뻔 했다.

“저녁은 됐어. 술이나 좀 준비해 주지 그래.”

“네.”

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욕 후에 갈아입을 남편의 옷을 서랍에서 꺼낼 때, 남편의 시선을 열린 서랍 쪽으로 끌었다. 중위는 다가가 장롱 서랍 속을 들여다보았다. 잘 정돈된 옷 보관함에는 유품을 받을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하나하나 쓰여 있었다. 이렇듯 갸륵한 레이코의 각오를 확인한 중위는 조금의 슬픔도 느낄 수 없었으며 오히려 마음속은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마치 젊은 아내의 어리광 섞인 쇼핑을 본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중위는 이런 아내가 사랑스러운 나머지, 레이코를 뒤에서 꼭 끌어안고 목줄기에 입을 맞추었다. 레이코는 목줄기를 간질이는 남편의 수염을 느꼈다. 이런 감각은 레이코에게 있어 단순한 현세적인 것 이상이었으며, 말하자면 현실 그 자체였지만, 얼마 안 있어 이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느낌만은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하였다. 한순간 한순간이 생생한 힘을 불어넣어 주어, 온몸 구석구석까지 새로이 눈을 떴다. 레이코는 발끝에 힘을 주고 등 뒤에서 쏟아지는 남편의 애무를 섭취하였다.

“우선 몸을 좀 씻고, 술을 한 잔 하고 그리고 나서…… 그래, 이 층에 자리 좀 펴줘…….”

중위는 아내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레이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는 아무렇게나 군복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갔다. 레이코는 먼발치서 그 씻는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 있는 화롯불을 살핀 뒤, 술 데울 준비를 했다.

목욕 휴 갈아입을 옷과 허리띠와 속옷을 들고 목욕탕으로 가, 물이 따듯한지 물었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중위는 책상다리를 하고 수염을 깎고 있었다. 물에 젖은 그의 억센 등 근육이 팔의 움직임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의 지금은 절대로 특별한 시간이 아니었다. 레이코는 바지런히 손을 놀리며 즉석에서 안주를 만들었다. 손도 떨리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오히려 평소보다 명쾌하고 기분 좋게 돌아갔다. 그렇지만 때때로 가슴속 깊은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고동이 달음질쳤다. 그것은 마치 먼 번개와 같이 언뜻 강렬하게 달리다 사라지곤 했다. 이 사실 외에는 무엇 하나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목욕탕에서 중위는 수염을 깎다가, 한 번 덥혀진 몸속에서 저 주체할 수 없이 쌓여있던 고뇌의 피로가 씻은 듯 물러가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 설레는 기대로 채워져 있음을 느꼈다. 아내의 부산히 움직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러자 이틀간 잊고 지냈던 건강한 욕망이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중위는 두 사람이 죽음을 결정했을 때 느꼈던 그 환희에 단 한 치의 불순함도 없었음을 자신하였다. 그때 두 사람은, 물론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모르는 두 사람만의 정당한 쾌락이, 또다시 대의와 신의 권위, 그리고 조금의 부끄럼 없는 완전한 도덕으로 지켜졌음을 느꼈던 것이다. 즉, 두 사람이 눈을 마주하다가 서로의 눈 속에서 죽음의 정당한 이유를 발견했을 때, 다시금 그들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철벽에 둘러싸인 채, 남들이 감히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미와 정의로 무장된 것을 느낀 것이다. 따라서 중위는 자신의 육체의 욕망과 우국지정 사이에서 그 어떤 모순과 당착도 찾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우국지정과 동일하게 생각할 수조차 있었다.

수증기로 뿌옇게 된 어둡고 금 간 거울에 얼굴을 내밀고 중위는 정성껏 수염을 깎았다. 이 얼굴 이대로 죽는다. 남김없이 깨끗이 깎아야 했다. 면도한 얼굴은 다시 싱싱하게 빛이 나 어두운 거울이 황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화려하고 건강한 얼굴과 죽음과 관계에는 이를테면 어떤 산뜻한 멋이 있었다.

이 얼굴 이대로 죽게 된다! 이미 이 얼굴은, 정확히 말하자면 절반은 중위의 소유를 떠나, 전사한 군인의 기념비 위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눈을 감아 보았다. 모든 것은 어둠에 둘러싸였으며, 이미 그는 사물을 보는 인간이 아니었다.

목욕을 마친 중위는 윤기가 흐르는 뺨 위에 푸르스름한 면도 자국을 빛내며 뜨겁게 피어오른 화로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이 바쁜 와중에도 레이코가 재빨리 화장을 고친 것을 중위는 알았다. 두 볼은 매우 화려하였고, 입술은 촉촉함을 더했으며 슬픈 기색이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젊은 아내의 이런 꿋꿋한 모습을 보고 그는 정말 이 여자를 아내로 맞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중위는 잔을 비우고, 그것을 곧 레이코에게 건네주었다. 한번도 술을 마신 적이 없는 레이코였지만, 순순히 잔을 받아 들고 조심조심 입을 대었다.

“이리와.”

하고 중위가 말했다. 레이코는 남편 곁으로 가 비스듬히 안겼다. 가슴은 격렬히 요동쳤으며, 슬픔의 정서와 희열이 독한 술을 섞어 놓은 듯 어지럽게 되었다. 중위는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보는 마지막 사람의 얼굴, 마지막 여자의 얼굴이었다. 나그네가 길 떠나며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땅의 정겨운 풍경에 쏟아붓는 눈빛으로, 중위는 꼼꼼히 아내의 얼굴을 점검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은 가지런하면서도 차가움이 없었고, 입술은 부드러운 함으로 살며시 닫혀 있었다.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의 얼굴은 전혀 흐느낌의 추함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았지만, 닫혀진 눈의 긴 속눈썹 그늘에서는 눈물방울이 송송이 솟아나와 눈가로 흐르며 빛났다.

이윽고 중위가 이 층 침실로 재촉하자, 아내는 몸을 씻고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중위는 혼자 이 층에 올라가, 가스스토브로 덥혀진 침실에 들어가 이블 위에 큰 대자로 누웠다. 이렇게 아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평소와 똑같이 느껴졌다.

그는 두 손을 머리 밑에 깍지를 끼어 넣고, 스탠드 불빛이 닿지 않는 어슴푸레한 천장 판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죽음일까, 아니면 광적인 감각의 기쁨일까. 이 두 가지가 중복되어, 마치 육체의 욕망이 죽음을 향해 있는 것처럼도 생각되었다. 어쨌든 중위기 이렇게까지 혼신의 자유를 맛본 적은 없었다.

창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길 한 모퉁이에 남은 눈을 박차는 바퀴소리가 삐걱거린다. 근처 담벼락에는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렇게 누워 가만히 듣고 있자니 변함없이 분주히 돌아가는 사회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여기만은 고도처럼 외로이 우뚝 솟아 있는 듯 느껴졌다.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나라는 이 집 주변에 크고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었다. 자신은 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 자신이 인생을 버려 가면서까지 깨우치게 하려는 이 거대한 나라는 과연 이 죽음에 대해 단 한 번만이라도 돌아봐 줄 것인가. 아무래도 좋았다. 이곳은 화려하지 않는 전쟁터였다. 누구에게도 공훈을 뽐낼 수 없는 전쟁터였으며, 영혼의 최전선이었다.

레이코가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집의 가파른 층계는 몹시 삐걱거렸다. 저 소리도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겠지. 중위는 잠자리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수없이 이 감미로운 삐걱거림을 들었던 것이다. 두 번 다시 이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귀중한 시간의 한순간 한순간을 그 부드러운 발바닥이 일으키는 삐걱거림으로 가득 채우려고 해보았다. 그렇게 시간은 빛을 발하며 보석이 되었다.

레이코는 가운에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띠의 주홍빛은 옅은 어둠 속에서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중위가 그것에 손을 대자, 레이코는 쉽게 풀 수 있도록 남편을 도왔다. 띠는 출렁이며 바닥에 흘러내렸다. 중위는 아직 가운을 입은 채인 아내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안으려고 했다. 겨드랑이의 따스한 피부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중위는 그 손가락 감촉에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욕망에 휩싸였다.

두 사람은 스토브 불빛 앞에서 어느 틈엔가 자연스레 알몸이 되었다.

아무 말도 않았지만, 몸도 마음도 설레는 가슴도 이것이 마지막 행위라는 생각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마지막 행위’라는 두 글자는 보이지 않는 먹으로 온몸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중위는 뜨겁게 젊은 아내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둘의 혀는 상대의 부드러운 입 속 구석 구석까지 확인했으며, 아직 어디에도 눈뜨지 않은 죽음의 고통이 혀의 감각을 뜨겁게 달군 쇠처럼 새빨갛게 불려 줌을 느꼈다. 아직 느낄 수 없는 죽음의 고통, 이 아득한 죽음의 고통이 그들의 쾌감을 정련했던 것이다.

“당신 몸을 보는 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군. 잘 보여 줘.”

하고 중위가 말했다. 그리고 스탠드 갓을 저쪽으로 기울여 가로누운 레이코의 몸에 빛이 골고루 비추도록 하였다.

레이코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낮게 드리운 불빛이 우유빛의 성스러운 육체의 굴곡을 잘 보여 주었다. 중위는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육체의 붕괴를 보지 않고 죽을 수 있는 행운을 기뻐했던 것이다.

중위는 잊을 수 없는 레이코의 육체를 천천히, 그리고 흠뻑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매만지고 또 한 손으로는 찬찬히 아름다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길 닿는 곳 하나하나 입을 맞추었다. 조용하고 차갑고 수려한 이마, 희미한 눈썹 아래 긴 속눈썹이 머물고 있는 두 눈, 오똑한 콧날, 적당히 도톰하고 단정한 입술 사이로 살짝 내다보고 있는 하얀 이, 보드라운 볼과 영리한 작은 턱……, 이런 것들이 주검의 얼굴을 실로 화려하게 해주리라. 이윽고 중위는 레이코가 자기 손으로 찌르게 될 하얀 목줄기를 몇 번이고 삼킬 듯 빨아 노을빛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입술로 되돌아와 입술을 가볍게 누르며 자신의 입술을 그 입술 위에서 작은 조각배가 일렁이듯 움직였다. 눈을 감자 온 세상이 요람인 듯하였다.

중위의 눈이 본 그대로를 입술이 충실히 다시 그렸다. 그 높게 탄식하는 유방은 벚꽃 봉오리와 같은 유두를 가졌고, 중위의 입술 속에 채워진 봉오리는 단단해져 갔다. 가슴의 양 겨드랑이에서 완만한 선을 그리며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팔, 그 동그란 팔은 그대로 다시 손목 쪽으로 흐르며 절묘하게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는 결혼식 때 부채를 쥐고 있던 섬세한 손가락이 있었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는 중위의 입술 앞에서 수줍은 듯 서로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가슴에서 복부로 흐르는 타고난 듯 자연스러운 잘록함은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을 품고 있어, 그곳에서 허리로 펼쳐지는 풍부한 곡선을 짐작케 하였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육체의 올바른 규율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빛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 하얗고 풍만한 복부와 허리는 큰 그릇에 가득 채워 놓은 젖과 같았고, 유달리 깨끗하게 파인 배꼽은 지금 막 한 방울 빗물이 세차게 뚫어 놓은 신선한 흔적과도 같았다. 그림자가 점차로 짙게 모이는 부분에는 음모가 부드럽고 민감하게 숲을 이루었다. 향기로운 꽃이 타들어 가는 듯한 채취는 지금은 가라앉아 이지 않은 육체의 끝없는 동요와 함께 그 숲 속에서 조금씩 높아만 갔다.

이윽고 레이코는 숨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보여줘요……. 저에게도 당신의 추억을 보여 주세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내의 입에서 이렇게 강하고 정당한 요구가 나온 족은 없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삼가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감추어 두었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으로 들렸다. 중위는 이에 응해 순순히 가로누워 아내에게 몸을 맡겼다. 음탕하게 요동치던 흰 육체는 부드럽게 몸을 일으켰다. 남편에게 받은 그대로를 다시 남편에게 돌려주려는 사랑스러운 소망으로 뜨거워졌다.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중위의 눈을 두 개의 하얀 손가락으로 흐르듯 쓰다듬어 감겼다.

레이코는 눈꺼풀마저 붉게 물들었을 만큼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연민의 정을 참지 못하고 중위의 얼굴을 껴안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유방을 찔렀다. 남편의 우뚝한 코는 차갑고 깊이 파묻혀, 그 숨은 뜨겁게 유방에 와 닿았다. 그녀는 약간 떨어져, 이 남자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늠름한 눈썹, 굳게 감은 눈, 수려한 콧마루, 꾹 다문 잘생긴 입술……, 파르스름한 면도 자국이 남아 있는 뺨은 불빛을 받아 매끈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코는 그 하나하나에, 그리고 굵은 목줄기와 떡 벌어진 어깨, 두 장의 방패가 경쟁이라도 하듯 붙어 있는 당당한 가슴과 그 주황빛 유두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의 근육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겨드랑이의 울창한 털에서는 달콤하고 암울한 채취가 떠돌았다. 이 체취의 달콤함에는 까닭 모를 청년의 죽음에 대한 실감이 어려 있었다. 중위의 피부는 보리밭 같은 광택을 지니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은 선명한 윤곽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복근 힘줄 아래에서는 조심스럽게 배꼽을 이루고 있었다. 레이코는 남편의 이 젊고도 근육으로 뭉쳐진 단단한 배, 무성한 털로 덮인 겸허한 배를 보고 있다가, 얼마 후 이 부분이 무참히 찢어질 것을 생각하고는 애처로운 나머지 그곳에 엎드려 눈물을 쏟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자리에 누워 있던 중위는 배 위에 쏟아지는 아내의 눈물을 느끼고, 그 어떤 끔찍한 할복의 고통에도 참아내리라고 용기를 다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두 사람이 얼마만큼 극진한 환희를 맛볼 수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중위는 씩씩하게 몸을 일으켜 슬픔과 눈물로 녹초가 되어버린 아내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양 볼을 번갈아가며 서로 미칠 듯이 비벼댔다. 레이코의 몸은 떨고 있었다. 땀에 젖은 가슴과 가슴은 꼭 달라붙어 두 번 다시 떨어지지 못하리라 생각될 만큼 젊고 아름다운 두 육체는 구석구석까지 하나가 되었다. 레이코는 울부짖었다. 높은 곳에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나락에서 날개를 펴 다시 아득히 높은 곳까지 올라가 하늘을 떠다녔다. 중위는 장거리 구보를 하는 연대 기수처럼 헐떡거렸다. ……그렇게 한 차례 거센 폭풍이 몰아쳤다. 폭풍이 지나가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또 다른 파도에 휩쓸렸다. 두 사람은 다시 서로 힘을 합쳤다. 그리고, 지치는 기색도 없이 단숨에 정상을 향해 달음질쳤다.


4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중위가 몸을 일으킨 것은 싫증이 나서가 아니었다. 첫째는 할복하는 데 필요한 기력이 소진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지나치게 욕구를 탐닉하다 마지막의 감미로운 추억을 망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중위가 완전히 몸을 떼자, 여느 때처럼 레이코도 얌전히 이에 따랐다.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 손을 꼭잡고 똑바로 누워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다. 땀이 한꺼번에 식어갔지만 스토브의 열기로 조금도 춥지 않았다. 이 일대는 밤이 되면 몹시도 조용해져 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요츠야 역 근방을 지나는 국영전차와 시영전차 소리도 도심 내에서만 메아리칠 뿐, 아카사카 별궁 앞의 넓은 차선에 접한 공원 숲에 가리어 이 집까지는 닿지도 않았다. 이 동경의 한 구석에서 지금도 둘로 나뉜 일본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긴박감은 거짓말 같았다.

두 사람은 몸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뜨거움을 느끼면서 지금 막 맛본 최상의 쾌락을 떠올렸다. 한순간 한순간 끝없는 입멋춤의 맛, 피부의 감촉, 눈앞이 아찔해지는 상쾌함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두운 천장에서는 그러나 이미 죽음의 얼굴이 엿보고 있었다. 그 기쁨은 최후의 환희였으며, 두 번 다시 이들 몸에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앞으로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그만한 환희에 젖어 볼 수 있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음이 거의 확실하였으며, 이 생각에는 둘 다 동감이었다.

서로 꼭 잡고 있는 손끝의 감촉, 이것도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어두운 천장의 나무결 무늬조차 이윽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죽음이 바싹 몸 가까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용기를 내야 한다. 그 죽음에 우리가 먼저 달려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 준비를 해볼까.”

하고 중위가 말했다, 이것은 확실히 결연한 어조로 말한 것이었지만, 레이코는 지금껏 이렇게까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니 여러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불을 갠 적이 없었지만, 이 날만큼은 흔쾌히 이불장을 열고 손수 이불을 개어 넣었다.

중위가 집을 비운 동안 레이코는 이 방 정리를 끝내고 깨끗이 청소해 두었다. 그 덕에 가스스토브 불을 끄고 스탠드를 치우고 나자, 한쪽 구석에 놓인 자단나무 탁자를 빼면, 8장짜리 방은 중요한 손님을 맞기 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기서 한잔씩 하곤 했었지. 가노하고 혼마하고 노구치하고.”

“정말 모두 잘 드셨었죠.”

“그 녀석과들도 곧 저승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당신을 데려온 것을 보고는 필시 녀석들은 날 놀려 대겠지.”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중위는 지금 환하게 불을 켜놓은 이 깨끗하고 조용한 방 쪽을 뒤돌아보았다. 저 방에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서로의 이야기를 격의 없이 뽐내던 청년 장고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저 방에서 자신이 할복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래층 두 방에서 부부는 물흐르듯 담담히 각자의 준비를 서둘렀다. 중위는 용변을 보러 간 김에 몸을 정결하게 하려고 목욕탕에 들어갔다. 그동안 레이코는 남편의 옷을 개어 놓고, 군복 상하의와 햇볕 아래 걸어 두어 하얗게 표백된 여섯 자짜리 훈도시를 욕탕 앞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유서를 쓸 종이를 탁자 위에 갖춰 놓고, 벼루 뚜껑을 열어 먹을 갈기 시작했다. 유서에 쓸 문구는 이미 생각해 둔 터였다.

레이코의 손가락이 싸늘한 먹의 금박 부분을 눌렀다, 벼루의 바다는 마치 검은 구름이 퍼져 나가듯 삽시간에 흐려졌다. 그녀는 이런 행위의 반복, 이 손가락의 압력, 그리고 이 희미한 소리의 왕래를 오로지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죽음이 바야흐로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 이런 것들은 시간을 담담히 쪼개 주는, 늘 하는 집안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갈면 갈수록 매끄러움을 더해가는 먹의 감촉과 짙어지는 먹 냄새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두움이 배어 있었다.

맨살 위에 군복을 말쑥이 차려입은 중위가 목욕탕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잠자코 탁자 앞에 정좌를 하고 앉아 붓을 들었다. 중위는 종이를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었다.

레이코는 경사가 있을 때나 입는 흰옷 한 벌을 들고 목욕탕에 가 몸을 정결히 하고 엷게 화장을 하였다. 흰옷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나왔을 때, 등불 아래 놓인 유서에는 까맣게,

황군만세 육군보병중위 다케야마 신지(皇軍萬歲陸軍步兵中尉武山信二)

라고 만 쓰여 있었다.

레이코가 그 건너편에 앉아 유서를 쓰는 동안, 중위는 아무 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붓을 쥔 아내의 하얀 손가락의 단정한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중위는 군도를 차고, 레이코는 흰옷의 띠에 은장도를 꽂아 놓았다. 그리고 유서를 들고 신전 앞에 나란히 서서 묵도를 마친 뒤, 아래층의 전기를 모두 껐다. 이 층으로 올라가다 뒤를 돌아본 중위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논을 밑으로 내리고 그를 따라 올라오는 흰옷을 입은 아내의 아름다음에 눈을 크게 떴다. 유서는 이 층 마루에 나란히 놓여졌다. 족자를 당연히 떼어 내야 했으나, 중매를 선 오제키 중장의 친필인데다 지성(至誠)이란 두 글자였으므로 그대로 두었다. 설령 피가 튀어 더럽힌다 하더라도 중장은 양해해 줄 것이다.

중위는 기둥을 등지고 정좌한 채, 군도를 무릎 앞에 가로놓았다.

레이코는 다다미 한 장을 사이에 둔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모든 것이 하얗기만 해, 엷게 칠한 입술이 몹시도 요염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다다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가만히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중위의 무릎 앞에는 군도가 있었다. 레이코는 군도를 보고 첫날밤이 머릿속에 떠올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중위는 숨죽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 목을 쳐 줄 사람이 없으니 깊게 찔러야겠지. 보고 있기 힘들겠지만, 겁내선 안 돼. 어차피 죽음이란 것은 옆에서 보고 있기엔 끔찍한 거야. 그것을 보고 꺾여선 안 돼. 알겠지?”

“네.”

레이코는 깊이 끄덕거렸다.

그 희고 나긋나긋한 모습을 보고, 죽음을 앞에 둔 중위는 묘한 도취감을 맛보았다. 이제부터 자신이 시작하는 것은, 일찍이 아내에게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군인으로서의 공적인 행위였다. 전쟁터에서의 결전과 똑같은 결의가 필요한, 전쟁터에서의 죽음과 동등 동질한 죽음이었다. 자신은 지금 전쟁터의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잠깐 동안 중위를 알 수 없는 환상 속으로 이끌었다, 전쟁터의 고독한 죽음과 눈앞의 아름다운 아내, 이 두 가지 차원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도 없는 둘의 공존을 구현하며 지금 자신이 죽으려고 하고 있다는 감각에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미로운 것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다. 아내의 아름다운 눈이 자신의 죽음 한순간 한순간을 시중들어 주는 것은, 향기 짙은 미풍을 맞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는 무엇인가가 허락되어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모르는 경지에서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경지가 허락되어 있는 것이었다. 중위는 눈앞에 있는 새색시처럼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에서, 자신이 사랑하며 몸 바쳐 온 황실과 국과와 군기와, 그리고 그것들 모두가 화려하게 미화된 환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들은 눈앞의 신부와 마찬가지였으며, 어디에서라도 아무리 먼 곳에서라도 끊임없이 맑은 눈빛을 발하며 자신을 주시해 줄 존재였다.

레이코도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남편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군복이 잘 어울리는 중위는 그 늠름한 눈썹, 그 꾹 다문 입술과 함께,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아마도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은 것이리라.

“자, 시작한다.”

드디어 중위가 입을 열었다. 레이코는 방바닥에 깊이 몸을 엎드려 절을 했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눈물로 화장한 얼굴이 얼룩지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그러나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얼굴을 들었을 때, 눈물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이미 군도를 뽑아 든 남편의 모습이었다. 남편은 군도 끝 15센티 정도를 남겨 놓고 하얀 천을 감고 있었다.

군도를 다 감고 무릎 앞에 두더니 중위는 무릎을 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군복 옷깃의 단추를 풀었다. 그 눈은 이미 아내를 보지 않았다. 놋쇠로 만든 넓적한 단추를 하나하나 천천히 풀었다. 거무튀튀한 가슴이 드러나고 곧이어 복부가 드러났다. 허리띠를 풀고 바지 단추를 끌렀다. 여섯 자짜리 하얀 훈도시가 보였다. 중위는 더욱 복부를 펴고 훈도시를 두 손으로 아래로 끌어내린 후, 오른손으로 하얀 천으로 싼 군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눈을 내리떠 자신의 배를 보고 왼손으로 아랫배를 문질러 부드럽게 하였다.

중위는 칼이 잘 들지 걱정되었다. 바지 왼쪽을 접어 내려 허벅지를 드러낸 후, 그 부분에 가볍게 칼을 미끄러뜨려 보았다. 순식간에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고, 가느다란 몇 가닥의 핏줄기가 밝은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가랑이 쪽으로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남편의 피를 본 레이코의 가슴은 마구 고동치기 시작하였다,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중위는 태연히 그 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시적인 인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레이코는 순간적으로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때 중위는 매와 같은 눈빛으로 아내를 세차게 응시하였다. 칼을 앞으로 돌리고 허리를 들어 올려 상반신이 칼끝을 덮쳐 누르듯 한 채, 온몸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음을 군복의 성난 어깨에서 알 수 있었다. 중위는 단숨에, 그리고 깊이 왼쪽 옆구리를 찌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침묵의 방을 꿰뚫었다.

중위는 자기 손으로 힘을 주었음에도 마치 누군가로부터 굵은 쇠몽둥이로 옆구리를 통타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졌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15센티 정도 남겨놓았던 칼끝은 이미 완전히 살 속에 파묻혀 주먹으로 쥐고 있는 하얀 천이 바로 옆구리 옆에 닿아 있었다.

의식이 돌아왔다 칼은 분명히 복막을 뚫었다고 중위는 생각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가슴은 몹시 고동쳤다. 자신의 몸속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아주 먼 깊은 곳에서, 땅이 갈라지고 뜨거운 용암이 흘러나오듯, 무서운 고통이 솟아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고통이 무서운 속도로 닥쳐왔다.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흘릴 뻔 했으나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이것이 할복이란 것인가. 그것은 하늘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듯한 엉망진창인 감각이었다. 찌르기 전에는 그토록 굳건해 보이던 자신의 의지와 용기가 지금은 가느다란 철사 한 가닥처럼 되어버려, 오로지 이것에 매달려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주먹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아래를 보니 하얀 천도 주먹도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훈도시도 이미 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직 보일 것이 보이고 존재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코는 중위가 왼쪽 옆구리에 칼을 꽂는 순간, 그 얼굴이 삽시간에 막을 내린 것처럼 핏기가 물러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 곁으로 뛰어가려고 했고, 또한 이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어쨌든 보고 있어야 한다. 끝까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남편이 레이코에게 부여한 임무였다. 다다미 한 장 사이 저편에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고통을 참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고통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정확함으로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레이코에게는 그 것을 막을 아무런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이마는 베어 나오는 땀으로 빛나고 있었다. 중위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시험하듯이 눈을 떴다. 그 눈은 여느 때의 광채를 잃었고, 작은 동물의 눈처럼 천진하고 얼빠져 보였다.

고통은 레이코의 눈앞에서, 레이코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비탄에는 아랑곳 않고 한여름의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고통은 점차 키를 더했다. 발돋움했다. 남편은 이미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그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 한원당해 손을 뻗쳐도 만질 수 없는 고통의 우리 안에 갇힌 죄인처럼 된 것을 레이코는 느꼈다. 하지만 레이코는 아프지 않았다. 비탄은 아프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레이코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 누군가 무정한 유리벽을 높이 세워 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 이후 남편이 존재하고 있는 곳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남편의 숨결 하나하나는 또한 자신의 숨결이기도 했는데, 지금 이 순간 남편은 고통 속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레이코는 비탄 속에서 무엇 하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증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중위는 오른손으로 그대로 끌어당기려고 했으나, 칼끝이 창자에 걸려 자칫하면 부드러운 탄력에 밖으로 밀려 나올 뻔했다. 그래서 중위는 오른손에 전신의 힘을 모아 당겼다. 10여 센티 정도 갈라졌다.

고통은 배 속에서 서서히 퍼지더니 배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마치 난타당하는 종과 같았다. 자신이 내쉬는 호흡마디마디마다, 자신의 맥박이 한 번 칠 때마다, 고통이 천개의 종을 한꺼번에 올리는 것이 아닐까 싶게 그의 존재를 마구 흔들어댔다. 중위는 더 이상 신음을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문득 밑을 보니 칼은 배꼽 아래까지 갈라놓고 있었다. 이를 본 그는 만족과 용기를 얻었다.

피는 점점 더 뽐내고 우쭐대며 상처에서 고동치듯 솟아올랐다. 앞에 있는 다다미는 핏줄기로 빨갛게 젖었고, 카키색 바지 주름에 고여 있던 피가 방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윽고 레이코의 흰옷 무릎 위에도 한 방울의 피가 멀리서 온 작은 새처럼 날아와 앉았다.

중위가 간신히 오른쪽 옆구리까지 당겼을 때, 이미 칼끝의 깊이는 약간 얕아져 기름기와 피로 미끌거리는 칼날 부분이 드러났다. 갑자기 구토가 밀려온 중위는 마른 비명을 질렀다. 구토가 고통을 더욱더 휘저어 놓았다. 지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배가 갑자기 물결쳐, 그 상처 부위가 크게 벌어졌다. 그러자 흡사 상처 부위가 있는 힘껏 토사라도 하듯 창자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창자는 주인의 고통도 모르는지 건강하고도 메스거우리만치 싱싱한 모습으로 희희낙락하며 미끄러져 나와 가랑이 사이에서 넘쳐흘렀다. 중위는 고개를 숙이고, 괴로운 듯 몹시 숨 가빠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입에서는 실타래 같은 침이 늘어져 있었다. 어깨에 단 훈장은 빛나고 있었다.

피는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중위의 무릎은 자신의 피로 생긴 웅덩이에 잠겨 있었고, 그곳에 중위는 한 손을 짚은 채 맥없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비린내가 방 안에 가득했다. 머리를 숙인 채 구토를 거듭하고 있는 움직임이 역력히 어깨에 나타났다. 창자에 밀려나온 듯, 칼의 몸체에는 이미 칼끝까지 드러내고 중위의 오른손에 들려있었다.

이때 중위가 힘주어 몸을 뒤로 젖힌 모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렬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너무도 급격히 뒤로 젖힌 탓에 뒷머리가 기둥에 부딪히는 소리가 명료하게 들릴 정도였다. 레이코는 그때까지 얼굴을 아래로 내리고, 그저 자신의 무릎 근처로 다가오는 피의 흐름만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으나, 이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중위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눈은 움푹 패고, 피부는 말라붙었으며, 그토록 아름답던 뺨과 입술은 흙빛이 되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만 힘겹게 칼을 쥐고 있는 오른손만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경솔히 움직이며 자신의 목줄기에 칼끝을 갖다 대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레이코는 남편의 임종에서 가장 괴롭고도 공허한 노력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피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칼끝이 몇 번이고 목줄기를 겨누었다. 계속 빗나갔다. 이미 기력이 다한 것이었다. 빗나간 칼끝이 옷깃을 찌르고 옷깃의 훈장을 찔렀다. 단추를 풀어놓았지만 군복의 뻣뻣한 옷깃은 마치 봉오리처럼 오므라들어 목줄기를 칼끝으로부터 지켜 주고 있었다.

레이코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남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피 속에서 무릎을 세우고 다가가, 하얀 옷자락은 온통 진홍빛으로 몰들었다. 그녀는 남편 등 뒤로 돌아가 옷깃을 풀어주었다. 도울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떨리고 있는 칼끝이 간신히 맨살의 목줄기에 닿았다 이때였다. 레이코는 자신이 남편을 밀쳐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중위가 스스로 의도했던 마지막 힘이었다. 그는 갑자기 칼을 향해 몸을 던졌고, 칼은 그의 목줄기를 관통했다. 엄청난 양의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과 동시에, 전등 아래서, 냉정하고 푸르디푸른 칼끝을 쫑긋 세운 채, 비로소 조용히 가라앉았다.


5

레이코는 피로 미끌거리는 버선발로 천천히 층계를 내려왔다. 이미 이 층은 조용했다.

아래층에 전기를 켜고, 불기를 살폈으며, 가스 밸브를 잠근 후, 화로에 물을 뿌려 재속에 묻어둔 불씨를 껐다. 작은 방에 있는 거울 앞으로 가 걸어놓은 발을 걷었다. 피가 흰옷을 화려하고 대담한 무늬로 수놓은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거울 앞에 앉으니, 허벅지 부분이 남편의 피에 젖어 있어 몹시 차가웠다. 레이코는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화장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불은 약간 짙은 주홍색으로 바르고, 입술도 짙게 칠했다. 이것은 이미 남편을 위한 화장이 아니었다. 남겨진 세계를 위한 화장으로, 그녀의 화장솔엔 장엄한 무언가가 어려 있었다. 일어나 보니 거울 앞의 다다미는 피에 젖어 있었다. 레이코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손을 씻은 후, 마지막으로 현관 바닥 위에 섰다. 어젯밤 남편이 이 현관 열쇠를 잠근 곳은 죽음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열쇠를 열어 둘까 말까. 만약 열쇠를 잠가 두면 이웃 사람들이 며칠 동안 두 사람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레이코는 자기 부부들의 시신이 부패된 채 발견되기를 원치 않았다. 역시 열어두는 편이 좋겠어…….그녀는 열쇠를 끌러내고는 간유리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 닥쳤다. 심야의 길거리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며, 길 건너편 저택 나무 사이로 얼어붙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레이코는 문을 그대로 둔 채 층계를 올라갔다. 여기저기 걸어다녀 그런지 더 이상 버선은 미끄럽지 않았다. 층계를 절반쯤 올라온 곳에서부터 이미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중위는 피바다 속에 엎드려 있었다. 목덜미를 꿰뚫고 서 있는 칼끝이 아까보다 더 나와 있는 것 같았다.

레이코는 피가 고여 있는 곳을 태연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중위의 시선 옆에 앉아 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중위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머리를 안아 올려 옷소매로 입술의 피를 닦은 뒤, 작별의 입맞춤을 했다.

그리로 일어나 반침에서 산 흰 담요와 허리띠를 꺼냈다. 옷자락이 흩어지지 않도록 허리에 담요를 감고 허리띠를 질끈 동여맸다.

레이코는 중위의 시선에서 한 자쯤 떨어진 곳에 앉았다. 은장도를 허리춤에서 뽑았다. 가만히 말간 칼끝을 바라보다 혀를 대 보았다. 잘 갈은 강철에서는 약간 단맛이 났다.

레이코는 주저하지 않았다. 조금 전 죽어가는 남편과 자신을 그토록 갈라놓았던 고통이 이번엔 자신의 몫이 되리라 생각하니 남편이 이미 영유하고 있던 남편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뭔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 수수께끼를 풀어 보는 것이었다. 레이코는 남편이 믿었던 대의의 참된 쓰라림과 달콤함을 이제야말로 자신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남편을 통해 간신히 맛보아 오던 것을 이번에는 틀림없는 자신의 혀로 맛보는 것이었다.

레이코는 목줄기에 칼끝을 대었다. 한 번 찔렀다. 얕았다. 머리가 몹시 뜨거워져 왔고, 손이 마구 떨렸다. 칼을 옆으로 힘껏 당겼다. 입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고, 눈앞은 쏟아지는 피의 환영으로 새빨갛게 되었다. 그녀는 힘을 얻고는 칼끝을 세차게 목구멍 깊은 곳으로 찔러 넣었다.


Ⓒ미시마 유키오,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2], 도서출판 살림

-FIN-

미시마 유키오는 내가 아는 작가 중 삼박자를 고루 가춘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 통속적 스토리를 예술로 만드는 빼어난 플롯, 심리적 묘사로 깊이가 있는 인물. 나는 언제나 미시마 유키오를 동경했다. 다만 그가 믿던 사상만큼은 절대 인정해 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 필사한 이 작품은 번역된 작품 중 그의 정치적 색깔이 가장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작품일 것이다. 천황에 대한 숭배, 옛날에 대한 향수, 군국주의. 그렇다, 그는 극우주의자다.

극우성향 집안에서 태어나 허약한 육체에 대한 콤플렉스와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크며 그는 보수성향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사소설적인 [가면의 고백]이나 인간의 이상심리를 다룬 [금각사]같은 초창기 작품들에선 그나마 극우성향이 드러나지 않았다.(그 때문인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은 [우국]을 제외하곤 초중기 작품들이다.)자신의 육체적 콤플렉스에 대한 음울한 유미주의가 돋보였을 뿐이다. 그가 극우 성향이 극단에 다다르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이 작품 이후다. 이때가 자신의 골골거리던 육체를 보디빌딩으로 개조하고 육체적 콤플렉스를 탈피한 후의 일이니 그가 보디빌딩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또 바뀌지 않았을까? 그는 결국 자신의 믿음을 위해 [우국]의 신지 중위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나로썬 받아드릴 수 없는 극단에 서있다.

[우국]은 인간 개인에 대한 죽음을 사회와 결부시키며 개인의 자유보다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는 죽음의 미학이라는 것을 설파한다. 난 이러한 극우적 미학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작품을 필사한 것은 미려한 필체와 플롯, 인물에 대한 심리적 묘사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정치적 색체는 싫어하지만 그의 글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대단한 작가가 잘못된(스스로는 좋은) 길로 빠졌을 때 나타나는 위험이 말이다. 그의 아름다운 글에 이끌려 같이 그 길로 빠져 들어가는 독자 또한 있었을 것이리라. 그가 만들고 소속된 극우단체 방패회가 아마도 그랬으리라. 위대한 작가가 위험한 사상에 빠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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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0/03/26 15:59 # 삭제 답글

    필사를 육필 외에 워드로도 하시나요?

    육필 쪽이 더 좋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잘 모르겠군요......; 뭐 책을 읽을 때도 종이 쪽이 좋긴 하지만.
  • 회색인간 2010/03/26 17:27 #

    육필이 더 좋다는 이유는 스스로 오타 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겠지만....손이 불편한 저로써는 몇번 돌아보는 한이 있더라도 워드로 칩니다. 몸이 불편하다는 건 이렇게 힘드네요
  • 히무라 2010/03/26 20:34 # 답글

    그런데 만약 자신의 글일경우 필사하면 왠지 혼이 깎여나가는 느낌...(녹차)
  • 회색인간 2010/03/26 21:12 #

    ...............왜 자기글을 필사하나여 문장 나빠지게.....필사랑 퇴고랑 착각하셨나? 므슨 뜻인지 못알아 듣겠음
  • 히무라 2010/03/26 21:51 #

    가끔씩 다른데 쓴 글을 보관을 위해 필사를 하게 되는데...
    그러한 필사는 왠지모르게 혼이 깎여나가는 느낌이 마구 들더군요.
  • 회색인간 2010/03/26 21:53 #

    그건 필사가 아닌듯......전혀 도움 안되는 짓이니 그만 두세요.....일단 필사는 대작가들 것들만 해도 바쁩니다.
  • 야옹야옹야아옹 2015/12/23 22:42 # 삭제 답글

    감사합니다. 급하게 찾아볼 일이 있었는데,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오래 지난 글인데, 몸이 불편하시다고 하시니 덧글 남기고 싶었습니다.
    건강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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